진 주 문 화 의 재 인 식 과 창 조 의 앞 소 리 꾼
“올곧은 진주정신과 진주문화 사랑에 헌신”
진주문화 창달 앞소리꾼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
강동욱/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 회원
지금 진주교육지원청에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 표지석은 지난 2011년 5월 5일 제 89회 어린이날을 맞이해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이 진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 리영달 이사장은 “지금으로부터 90년전, 암울했던 그 시대 진주의 선각자들은 미래의 주인공인 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진주소년회’를 만들었다. 1920년 8월 진주에서 조직된 진주소년회는 1923년 소파 방정환 등이 어린이날을 제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려 진주의 새싹들이 진주 문화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진주교육지원청에 표지석을 세우는 것이라고 했다.
진주의 새싹들이 진주문화를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진주교육지원청에 소년운동 발상지 비석을 세운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천년 역사도시 진주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올바른 지역문화 창달에 앞소리꾼 역할을 하기 위해 1995년 6월 12일 리영달 박사, 김장하 선생 등 60여 명의 지역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창립되었다.
진주문화사랑모임 창립 회원들은 지방자치의 진정한 의미는 주민자치와 함께 문화자치에 있음을 인식하고 네 가지 기치를 내세웠다. 첫째, 진주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가다듬어온 올곧은 진주정신과 진주문화 사랑에 헌신한다. 둘째, 진주문화의 재인식과 창조의 앞소리꾼이 된다. 셋째, 진주문화의 발전을 위해 관계기관 단체와 유대를 공고히 한다. 넷째, 진주문화의 창조를 위해 세대·계층 간의 이음새 역할을 한다. 진주 문화사랑 모임은 위와 같은 기치와 함께 실천 운동 전개를 선언하였다.
창립과 동시에 당시 진주에서 가장 큰 이슈였던 금성국민학교 건물보존 운동에 앞장섰다. 금성국민학교 건물은 일제시대인 1921년 진주 사람들이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삼고자 성금을 모아 남자보통학교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어려움을 겪던 중 진주에 있던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자 진주시민들이 큰 동요를 일으키게 된다.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일제는 여자보통학교 허가를 내어주었는데 진주여고의 전신이었던 일신여자보통학교였다. 후에 이 건물은 금성국민학교로 쓰이게 되었는데,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이 건물을 보존하려했던 것은, 시민들이 스스로 성금을 거두어 지었을 뿐 아니라 당시 백두산에서 건물 기둥에 쓸 나무를 가져와 지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은 민족 교육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방화로 의심되는 화재로 인하여 금성국민학교 건물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며 그 자리에는 지금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금성국민학교 건물 보존 운동을 시작으로 지금 진주교육지원청에 있는 옛 배영초등학교 건물을 중심으로 한 경남교육박물관 건립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진주는 경남교육의 발상지로 진주초등학교를 비롯한 경남교육의 역사적 산실이 지금도 건재한 곳으로 경남 교육박물관 건립의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현 배영초등학교 건물을 활용하면 경남 교육의 역사성을 교육계 및 지역민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진주의 대표적 도시 이미지로 자리 잡은 ‘진주팔경’도 진주문화사랑모임이 중심이 되어 제정하였다. 진주는 예부터 살기 좋고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진주의 풍광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진주10경’ ‘진주12경’을 시대에 따라 남겼다. 1997년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새로운 진주 8경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일은 진주시민들의 비상한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다. 2년 6개월 간 진주시민들로부터 1천여건의 추천을 받는 등 시민들의 참여가 대단했다. 1999년 10월 8일 진주성 촉석루, 남강 의암, 뒤벼리, 새벼리, 망진산 봉수대, 비봉산의 봄, 월아산 해돋이, 진양호 노을 등을 진주팔경으로 제정 공표했다.
1995년 광복 50주년 통일 기념 봉화제를 열면서 일제가 파괴한 진주 망진산 봉수대 복원사업을 전개했다. 진주시민과 출향인사 등 2,000여명이 참여하여 문화재 전문위원들의 감수와 고증을 거쳐 1996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준공식을 갖고 진주시에 기부 채납했다.
망진산 봉수대 복원사업과 함께 진주문화사랑 모임이 큰 의미를 두고 실천운동을 전개한 것은 3·1절 독립만세운동 재현이다. 이 일은 1919년 진주에서 일어났던 기생독립단과 걸인독립단의 만세운동을 재현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고,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추진한 사업이었다. 기미년 3월 19일 진주권번의 기생들이 “우리가 이 자리에서 칼에 맞아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여한이 없겠다”고 외치며 남강 변을 돌아 촉석루까지 행진했던 경로를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다. 1996년 2월 29일, 2,500여명의 시민들과 함께 한 문화 복원운동으로, 이후 지금까지 매년 3월 18일 재현 행사를 하고 있다.
진주문화사랑모임은 2006년 7월 1일~25일까지 해외 유출 문화재 반환 이정표를 세우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의 손에 있었던 진주대첩의 주역 김시민 장군 공신 교서 반환운동에 앞장서 2006년 7월 24일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는 1920년경 헐값에 일본에 팔려간 우리 문화재로 역사학자였던 미우라 히로유키(三浦周行.1931년 사망) 전 교토 제국대 교수의 개인 소장품이었던 것이 지난 2005년 11월 일본 동경의 경매물 도록 사진에 실려 처음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본의 한 고서점상이 이를 구입해 보관하고 있었다.
교토대 김문경 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교수 등에 의해 국내에 처음 소개가 되었으며, 경남일보가 이를 보도하면서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중앙박물관에서 매입해 국내로 들여와 진주성에 있는 국립 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중앙박물관에서 매입이 여의치 않자 지난 7월 1일부터 MBC ‘!느낌표’의 ‘위대한 유산 74434’ 코너 를 통해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 를 되찾기 위한 모금운동을 펼쳐왔으며 일본의 고서점상으로부터 이를 매입하기 위한 목표액 1400만 엔(한화 약 1억1천400만 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진주문화사랑모임을 중심으로 한 진주시민들의 적극적인 동참도 있었다.
현재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천년도시 진주의 역사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진주 객사를 비롯한 옛날 진주목 관아 건물이 있었던 곳에 표지석을 세우는 사업을 시민들과 함께 하고 있다. 1000년 전 진주의 모습을 후세들에게 알리기 위한 사업이다. 100년 전 경남도청이 있었던 당시 진주의 모습도 후세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진주는 역사의 도시, 충절의 도시이다. 하지만 진주를 찾아오는 관광객이 있다면 어디로 안내하여 천년 도시의 역사를 한눈에 보게 하며 충절의 역사에 감동을 느끼게 할 것인가. 여기에 생각이 미친 진주문화사랑 모임에서는 자연스럽게 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실현 방법을 모색해 온 지가 수년에 이른다. 진주 천년의 역사를 빛내어 진주 정신을 담아낼 진주 역사박물관 건립 추진을 위해서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는 범시민기구를 구성하고 진주성지와 가까운 옛날 시청 청사에 청소년문화회관과 함께 자리를 한다면 더욱 금상첨화가 아닐까 하고 추진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진주역사 박물관 건립을 숙원 사업으로 삼고 지금도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진주역사박물관은 진주 역사를 담아두는 시설이 아니라 진주역사를 창조하는 시설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리영달 이사장을 비롯한 60여명의 회원들은 오늘도 매진하고 있다. 지역 문화의 창달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진주지역 교사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바라고 있다. 경남교육박물관과 진주역사박물관이 하루속히 진주에 건립되기를 진주문화사랑모임 회원들은 간절히 바라면서 진주 지역문화 창달의 앞소리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끝>
사진설명) 진주문화사랑모임은 일본인들의 손에 있었던 진주대첩의 주역 김시민 장군 공신 교서 반환운동에 앞장서 2006년 7월 24일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했다.<진주에서 ‘느낌표’ 팀과 함께 문화재 반환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회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