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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우리나라 8대 도시 진주, 진주목

등록인 : 진주문화사랑
조회 : 819
2021.01.31
10:55


고려시대 우리나라 8대 도시 진주, 진주목


Q. 고려시대 때 진주가 8대 도시였습니까.

A. 예 정확하게 말하면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진주가 경기도 광주(廣州) ·충청도 충주(忠州) 충청도 청주(淸州) 경상도 상주(尙州) 전라도 전주(全州) 전라도 나주(羅州) 황해도 황주(黃州)와 함께 전국 8목중 하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당시 수도인 개경 서경인 평양, 동경인 경주와 함께 거점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성종 2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했는데, 이때 경기도 양주(楊州) 전라도 승주(昇州) 황해도 해주(海州) 충청도 공주가 제외돼 8목이 되었죠.

 

Q. 우리들이 흔히 진주목 진주목사라는 말을 자주하는데 이때 진주목이 된거군요

A. 예 그렇습니다.

 

Q. 그럼 고려 때 진주목이 되기전 진주는 어떤 도시였나요

A. 진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이었습니다. 663년 신라 문무왕이 삼국통일후 거열주()를 설치하였다가 신문왕 5(685)에는 정주(菁州), 경덕왕 16(757) 강주(康州)라고 고쳤습니다. 그리고 고려 성종 2(983) ()을 설치한 것입니다.

 

Q. 우리는 진주하면 가야나 신라 영토일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백제 영토라니 의외이군요

A. 진주는 신라영토였다기 보다 백제 지역이었습니다. 실제로 옛날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 6권 신라본기] 663년조 (신라 문무왕3). 거열주 설치 라는 항목에, 신라 장군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백제의 거열성을 비롯한 여러 성을 점령함으로써 진주는 신라에 속해졌고, 명칭도 거열주(居列州)로 되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이전에는 백제 땅이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죠,

또 고려사 936(고려태조19)년 조에 보면. 후백제의 신검이 강주도독 양검과 무주도독 용검과 함께 왕건에게 항복하여 강주는 고려에 영속되었다. 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 에도 후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고려 이전에는 진주가 백제 땅이었다는 것이죠. 그럼 고려시대 진주목의 규모는 어떠했습니까.

A. 목이란 원래 고대 구주(九州)의 장관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나, 뒤에 의미가 바뀌어 지방장관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초기 전국 12목에 외관(外官)을 파견함으로써 목이 비로소 지방 행정구획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상급 지방 행정구획으로서 목이 설치되었습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목은 정3품관인 목사가 파견되어 지방 행정의 소중심적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목에는 목사 이외 종6품관인 교수(敎授)가 파견되었습니다.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요즘 도의 개념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Q. 그러면 진주목사가 다스리는 구역이 굉장히 넓었을 것 같은데요.

A. 세종실록 지리지에 진주목 조에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2이니, 김해(金海)창원(昌原)이요, ()3이니, 함안(咸安)함양(咸陽)곤남(昆南)이며, ()12이니, 고성(固城)거제(巨濟)사천(泗川)거창(居昌)하동(河東)진성(珍城)칠원(漆原)산음(山陰)안음(安陰)삼가(三嘉)의령(宜寧)진해(鎭海)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경남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진주목의 규모가 대단했네요. 진주목은 진주목사가 다스렸겠죠. 고려시대 진주목사는 어떤사람들이 했습니까.

A.예 고려시대에는 진주판부사 진주부사 진주목사 등으로 불려졌습니다. 촉석루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김지대 목사 등 많은 목사들이 진주에 재직을 했는데 고려 고종떄인 1246년 진주목사로 재직한 왕해 목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Q. 왕해 목사는 어떤 목사였습니까.

A.왕해는 젊어서 급제하여 감찰어사에 임명되었는데, 법을 지키어 흔들림이 없었다. 진주 부사가 되어서는 아전이 그를 두려워하고 백성이 그에게 의탁하더니, 동도 유수(東都留守)로 옮기게 되자 모든 사람들이 울면서 유임할 것을 청하므로 드디어 조정에 간곡히 빌어서 옛 임소(任所)로 복귀하였다. 가는 곳마다 청백(淸白)하고 대절(大節)이 있어 계획하는 바가 모두 나라에 이로운 일이었다. 죽은 뒤에 모두 탄식하기를, “나라의 중한 보배가 죽었구나." 하였다.라고 하면서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Q. 정말 청백리로 이름난 진주목사 였군요. 또 지금 소개해 줄 목사가 없어신지요.

A. 예 고려말인 1376년 진주목사를 지낸 배극렴 목사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

Q. 이분도 왕해 목사 못지않은 청백리인가요.

A. 아닙니다. 이분은 진주목을 지킨 분으로 유명합니다. 배극렴 목사는 진주목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었으며, 상주목사(尙州牧使)계림윤(鷄林尹)화령윤(和寧尹)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무엇보다도 1376(우왕 2)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크게 격파하고, 이듬해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하여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의 방어에 공을 세웠으며, 이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하여 완성하니,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의 원조가 됩니다.

1378년 경상도원수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같은해 겨울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하여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 진주 반성현의 대혈전(大血戰), 울주전투와 청도전투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한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여 1380년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던 분입니다.

 

Q. 고려시대 진주목에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을 것 같은데 소개할만한 사건이 없습니까.

A. 좋은 사건은 아니지만, 12004월 정방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진주 아전들의 부패와 학대에 불평을 품고 있던 진주의 노비 수백 명이 12004월에 폭동을 일으켜 아전들의 집을 습격하여 50여 채를 불태웠다. 이에 진주목사 이순중은 이들을 모조리 추포하였는데 이때 창정(倉正) 정방의(鄭方義)가 사록 전수용(司祿 全守龍)을 찾아가서 시위를 하다가 옥에 갇히게 되자 그의 동생 창대가 읍아(邑衙)에 들어가 형을 구출한 후 그 무리들을 이끌고 고을에 마구 뛰어다니면서 평소에 원한이 있는 사람을 1,100명이나 살해했다. 이러한 소문이 각 지에 전해지자 김해, 밀성, 경주 등지에서도 소란해졌는데 조정에서는 이의 반란을 방지하느라고 상당히 고심했었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이러한 이들의 횡포에 대항하여 그 다음해 3월에 정방의를 죽이고 그의 아우 창대는 나머지 부하 200여 명을 이끌고 도피하는 것을 멀리 쫓아버림으로써 정방의의 난1년 만에 평정되었습니다.

 

Q. 고려시대 진주목 관할 지역에 왜구들의 침범도 빈번했다고 들었는데, 왜구들의 침략이 많았죠.

A. 1379(우왕5)년 왜의 진주 침범(侵犯)으로 진주 백성들이 단성으로 피난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왜구가 반성현(班城縣)을 노략질한 뒤 확산(確山) 정상에 올라 목책(木栅)을 세워서 스스로를 보호하였다. 우인열(禹仁烈박수경(朴修敬오언(吳彥)이 합심하여 포위하고 공격해서 이들을 쳐부수고는 34명의 목을 베었다. 왜구가 또한 산음(山陰진주(晉州사주(泗州함양(咸陽)을 노략질하였다. 이때 진주 사람들 대부분이 강성군(현재 산청군 단성면)의 산성으로 피난을 가서 왜구의 예봉을 겨우 면하였다.

138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촉석루가 소실되었으며 1388(고려 우왕14). 진주 목사 이빈이 왜구와 격전 중 전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Q. 박사님 고려시대 8대 도시 진주에는 훌륭한 목사와 왜구와 격전 중 전사한 목사도 있고 사건도 많았네요.

A. 예 그렇습니다. 우리 진주는 1896년 경남도청이 있었고 우리나라 역사상 근 현대사적으로 국가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농민항쟁 형평운동 등 일찍이 역사책에 등장한 사건들이 많았기에 먼 옛날인 고려시대 일은 기억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1000년전 진주는 전국 8대도시의 하나로서 그야말로 역동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다음 시간에는 진주가 왜 충절의 도시로 이름이 났는지, 무엇 때문에 목사 도시가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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